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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월 29일 자 <기독신보> 1052호

 

여권 문제에 대하여 (2)

 

함흥 최영혜

 

불신자가 자기 신에게 기도할 때 자매는 고사하고 노비가 기도를 청하면 허락하고 위하여 빌거든, 하물며 광대무변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총회로서 이와 같이 편협한 처리를 행하니, 우리 여신도 등은 호소할 곳이 없으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어린 양 같은 여식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우리의 사업이 일익 확장케 되고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라나이다. 대저 우리 조선 사회에서 여성을 차별하여 압박함과 눈물 나게 하며 마음을 괴롭게 하였으며 말 한 마디 자유로 못하게 하였으니, 하나님 앞에 받은 보응이 무엇이며 진보됨과 남달리 받은 복이 어디 있는가. 견책을 받아 같은 인류에게 종이 되었으니 그 받은 상이 장합니다. 작년에도 중화의 채정민 목사가 여자에게는 교회에서 언권 없다 하는 제목하에 우리 여성을 모욕적 언사로 저주까지 하고 성경을 짐짓 그릇 해석하여 <기독신보>에 기재한 고로 제가 즉시 <기독신보>를 통하여 변증하였거니와, 금번에 이 문제를 다시 진술케 됨은 총회 성경 연구위원도 남녀 성의 동일한 교권을 부인함으로 답변치 않을 수 없사오며, 제가 주의 도를 받은 지 31년 이상 모든 성경을 의지하여 여자에게 교회 치리권이 있는 것을 확신하였는 고로 장로교 정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제가 깨달은 것을 묵과할 수 없으며 일반 교우에게 각성을 촉진할 수밖에 없어서, 1933년에 함남에 있는 여신도 104인의 동지자를 얻어 연명 날인하여 함남노회 통과하여 선천에서 개회된 장로교 총회에 남녀 동일한 교권을 달라고 청원하였더니, 정치를 개정할 필요가 없다는 조건하에 퇴각을 당하였으나 1934년에 다시 함남에 있는 22처 교회 639인의 동지자의 연명 날인하여 함남노회를 경유하여 총회에 제출하여 달라 하였더니, 함남노회는 연년이 문제를 총회에 제출하기 미안하다는 조건하에 퇴각함으로 제가 당석에서 일장 설명하고 만고에 유한을 품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낙심치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고 남자들이 여성에게는 치리권을 아니 주는 것이 진리로 아는 것같이 ‘나는 치리권을 찾아야겠다’는 것은 내가 각오한 진리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점령하여 그 땅을 자기 동족에게 주는 것이 주께 받은 사명이고 자기 책임인 고로, 이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교회 규칙에 부자유한 정치를 타파하지 아니하고는 우리 여신자는 주께 받은 사명을 다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공의와 의분을 가지신 성도여 일어나셔서 이런 불공평한 교회 정치를 철폐하여 주시오며, 총회 성경 연구위원 제위는 주의종 바울이 전한 성경 한 구절만 가지고 우리 여신도를 압박하여 실행하고자 하나, 저는 우리를 구원하신 내 주의 모든 허락하신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이 일을 성취하는 날까지 약한 무릎을 꿇고 주님께 기도하나이다. (끝)

 

1936년 1월 22일 자 <기독신보> 1051호

 

여권 문제에 대하여 (1)

 

최영혜

 

우리 조선 32만 장로교인을 인도하는 최고 기관인 신학교장과 및 교수와 겸하여 장로교 총회에 선택을 받아 성경연구위원의 명의를 가지고 있는 라부렬 선교사와 동 위원 제위는, 우리 여신도에게도 스승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고의로 성경상 여권 문제를 그릇 해석함은 불가한 일이오. 만일 당신들이 성경의 상식이 부족하여 그와 같이 그릇 해석하였다면 가탄가경可歎可驚(탄식하고 놀라워할 만하다 – 편집자 주)이라 아니할 수 없음은, 마태 16장 18, 19절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주의 말씀이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심과 또 “네게 천국 열쇠를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 하신 말씀은 베드로 개인으로만 생각하는가요?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가 남자인고로 남성의 대표자로 인정함인지. 무론 남녀하고 반석 같은 신앙이 있는 자면 교회를 세울 권세와 교회를 치리할 권리가 있는 것을 참말로 알지 못하였을까요? 또 주께서 하신 말씀이 당신이 재림하실 때에 신실한 종에게 5읍을 차지할 종도 있다 하시고 10읍을 차지할 종도 있다 하셨으니, 신실한 종은 남자뿐이고 여자는 주의 신실한 종이 못 되는가요? 또 묵시 3장 21절 주께서 재림 시에 당신의 보좌에 동좌할 권은 이기는 자에게 주리라 하였으니, 이기는 자라 함은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야고보의 모친이 자기 두 아들을 데리고 주께 나와 최고 지위를 주어 달라고 간구할 때 주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내 좌우편에 앉게 할 것은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든지 그가 받으리라” 하였으니 누구라는 말씀은 홀로 남자뿐이며, 바울도 고린도 교인에게 “성도가 세상을 심판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하였으니 성도는 남자뿐이고 여자는 없는가요? 성도답지 못한 남자가 교회에 최고 지위를 가지고 노회와 총회에서 질투 분쟁을 일으켜 세인에게 추태를 나타내는 남자가 많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권리 남용하는 여신도에게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말만 성구로 알고, 갈라디아 교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녀 분별이 없다”는 말은 성경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부녀들을 도우란 말과 겐그레아교회에 여집사 뵈뵈를 자기와 같이 영접하고 성도에 합당한 대로 대접하라 하였으니, 대접이라 하는 것은 식물을 주는 것으로만 대접인가요? 바울과 같이 공기도권과 설교권과 행사할 수 있는 직권을 의미함이 아닌가요? 성도는 남자로만 아셨다 하면 오해가 극심하든지 성경을 인식하지 못하였다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은, 이 모든 성경이 증명하고 있는 남녀 동일한 교회 치리권을 알지 못함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자기 가족적 하나님으로 안 것과 유대인이 하나님을 자기 민족적 하나님으로 편견한 것과 다름이 없지요. 또 당신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비상 행동을 행하신다 하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옛적부터 예정하신 법칙은 고사하시고라도 (의외로) 여자에게 교회 치리권을 주실는지 어찌 알리오. 바울의 말을 다 성구로 받되 실행치 못할 지방과 처지 형편도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너희가 거룩히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하였으나, 현재 형편에서 조선 남녀 교우가 입맞춤으로 문안할 수 있습니까? 시방은 불신자 사회에서도 남녀 차별을 철폐하였거늘 그리스도의 박애를 체험하였다는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는 이런 불합리한 보수주의를 고집하고, 심지어 여전도 총회란 이름까지 미워하여 고쳐라 명령하여 개명케 하고, 또 장로교 총회 24회 시에 여전도연합대회에서 1년에 한 주일날을 택하여 우리 회와 산동 선교 사업을 위하여 기도하는 주일로 허락하여 달라는 청원까지 여지없이 퇴각하였으니, 이런 법이 세상에 어디 있으며 우리를 어떻게 이와 같이 대접합니까. 노·총회가 명령하여 아이 주일, 어머니 주일, 무슨 부 심지어 어떤 병원까지 위하여 한 주일씩 지키리라 하면서, 자매 된 여신도가 전도 사업이 잘 되기 위하여 기도하는 주일을 정하여 달라는 것을 거절함은 무슨 연고인가요. (속)

 

1935년 10월 30일 <기독신보> 1039호

 

<기독신보>를 읽고서 (3)

 

장민숙

 

2. 여권운동 반대하지 말 것

재작년에 어떤 목사님과 어떤 여선생이 ‘여자가 목사 될 수 없다, 될 수 있다’ 많은 성경 구절까지 인용하여 글을 쓴 것 본 기억도 난다. ‘아직 조선은 시기상조’라면 모르거니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은 일천만 여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아니 교회에서 그런 말이 나와야 할 것인가. 남자의 책임 여자의 책임 절대로 같지 않은 것 또 어느 정도까지 같은 것이 지금 있지 않은가. 지식계급·상·공·농 각 곳에 얼마나 전 세계 여자들이 활동하고 있는가. 공중으로 비행사, 교육계로 교육가, 종교계는 종교가 선교사, 병원, 기타 사회 사업 이것이다. 남자만 아니고 여자도 크게 활동하고 있지 않은가.

과거에 꿈도 못 꿀 일이 아닌가. 남자도 그렇다. 여자만 하던 음식이든지 세탁이든지 바느질이든지 지금은 어찌되었나. 큰 떼빠트(백화점 – 편집자 주)를 가 보라. 음식 만드는 쿡은 튼튼한 남자가 보지 않는가. 세탁 주문받으러 다니는 이가 누구냐. 남자다. 바늘로 양복 단추 구멍을 꿰매는 이가 남자가 가끔 있지 않은가. 절대로 책임이 다르다고 볼 수가 없는 요즘이 아닌가. 그렇다고 이 시대를 만족한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남자가 하는 일 여자가 한다고 여자가 하는 일 남자가 하게 되었다고 통쾌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상호부조하자는 것뿐이다. 세상 정치계에서도 여자가 대활약하거든 하느님나라에서야 어찌 남자와 같이 일을 아니할 것인가. 목사가 교회 위하여 땀을 흘리는가. 반드시 여자도 같이하여야 할 것이다. 순교한 이가 있는가. 어서 여목사도 있어서 예수님 위하여 순교할 만한 교역자가 조선에서 나기 바란다. 치리하지 말고 어서 나기를 바라야 한다. 칼이 잘 드는지 안 드는지 전쟁에 가서 시험하기 전에는 도저히 그 힘을 확실히 모른다. 아직 여목사가 조선 사람 중에 없고 또 조선의 장로교에서는 절대로 여자는 설교권을 안 주니까 얼마나 손해인가.

일본인은 조선교회에 와서 시찰함이 필요하다. 이곳은 지식으로 본다면 여러분보다 못하나, 그러나 하느님 말씀으로 설교할 때 은혜 풍성하다. 더러운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로 온 성 중 백성이 예수님을 보러 나오지 않았는가. 말씀 전하는 데 대하여 교회에서나 각 개인 가정에 가서나 전도함은 같지 않은가. 나는 지금 목사가 얼마나 많이 세상으로 보아서 타락한 이가 많은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목사가 많이 생기게 되면 그런 재미없는 일은 없을 줄 바라고 참으로 목사다운 여자 목사가 조선에서 나기 바란다. 따라서 여러분 일천만 우리 여성들이여, 우리 권리, 우리 이상, 우리 할 사업 누구의 할 것입니까. 마땅히 우리가 해야 되겠습니다. 가정에서부터 귀한 하느님의 자녀를 기르실 때 부모 되시는 분은 아들과 딸을 당신의 소유가 아니고 물건이 아닌 이상 여자라고 천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중히 여기지 않는 가정이나 사회는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다 주님의 나라와 부패한 이 사회에

한 줌의 비료라도 되기 위해 교육하고 부모의 전 책임을 쏟아 놓을 것뿐입니다. 이렇게 된다면은 할 일 많은데, 지금 이번과 같은 결의 조건은 생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남녀 차별을 버리고 예수님과 같이 인류 구원하기 위해 남녀가 다 일하러 나서야겠습니다. 우편 좌석이나 좌편 좌석을 차지할 분은 있습니다. 역시 하느님의 자녀랍니다. 누구에게 올지 모르나 하느님 자유에 있습니다. 여러분 여성들이여, 용기를 내소서.

구라파에서는 동등을 외친 소리가 오래였으며 현재 혁명가가 얼마나 많은지 아실 것입니다. 사회에 눈뜨시고 우리가 가져야 할 책임을 반드시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먼저 어느 사회보다도 기독교 신자가 먼저 여성운동 전선에 희생자가 안 되면 누가 되겠습니까. 무엇이든지 철저한 정의의 여성운동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의미에서 여성운동 반대하지 말기를 여러 교역자께 바라는 바입니다.

끝으로 바라는 것은 이번에 새찬송가가 되었으니 이번이야말로 장감(장로교·감리교 – 편집자 주) 교회가 찬송만은 합해지게 되고 감리교에서는 여목사 허락이 있으니 앞으로 참교역자다운 목자가 나기 바라며 장로교회에서도 좋은 여목사가 나서 같이 교회를 봉사할 희생적 교역자가 난다면 얼마나 주님께 영광 돌릴 일이리요. 한 가지 통탄할 일은 우리 조선은 여자 사회가 캄캄한 밤중이다. 언제나 깊이 든 꿈속을 뛰어나와 뒤떨어진 우리 갈 길 달음질쳐야 하겠다. 꼭 우리의 권리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렸으니 우리가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달라고 할 대상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사실상 무엇으로 보든지 피동적이었으니 자발적으로 모든 사업을 순서 있게 하기 위하여 부단의 노력을 하여야 하겠다는 것을 주장하고 앞날의 성공을 계약하고 <기독신보> 독후감과 신자로서의 우리 교회가 너무도 문제가 많은 것을 비통히 생각하고 소나기 온 후 볕이 나는 것과 같이 어서 속히 흑운의 막이 걷어지기를 기도하면서. (끝)

 

1935년 10월 16일 자 <기독신보> 1037호

 

<기독신보>를 읽고서 (1)

 

장민숙

 

목사도 아니고 전도부인도 아닌 평신도일 뿐인 자의 눈에는 무엇이 비치었는가

내가 이 글을 쓸 때 눈물을 주먹으로 닦으며 가슴은 찢어지는 듯하다. 오직 우리 조선교회 유일한 언론기관 <기독신보>를 통하여 각 교회가 과거에 깊이 든 꿈속에서 깨어나는 반가운 기사를 여기저기서 보게 된다. 조선서만 아니라 구라파 각 곳에서도 옥스퍼드운동이 맹렬하고 일본에서는 직접 구기미야 씨를 파송하여 시찰케 하고 지금 운동이 맹렬하고 있다. 어쨌든 현대 교회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일반이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요즈음 총회에서는 어떤 소식을 우리에게 던져 주었는가? 이것이 나를 울리게 하고 온 조선 신도를 울리게 하지 않는가. 교파 분쟁, 권리 다툼, 여권 문제 반대, 신구약 저자 논쟁, 그야말로 중세기 한가한 선배들이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머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토론한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냐. 우리 교계는 구약과 신약을 철저히 연구한다고 하는 학자는 손꼽을 만치도 없으며 따라서 원문을 거침없이 읽을 줄 아는 분도 몇 분이 안 되리라고 본다. 너무 무시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가슴이 아프니 자연히 학자 없는 한탄이 나온다. (하략)

 

1934년 9월 5일 자 <기독신보> 979호

 

채정민 목사의 ‘여자에게 언권 없다’에 대하여

 

함흥중앙교회 최영혜

 

<기독신보> 977호에 채정민 목사가 ‘정통 교회도 속염은 가외’라는 제목하에 ‘여자에게 언권 없다’ 하나, 나는 장로교회 정통 신경을 부인하는 자 아니요, 성경을 구구절절 그대로 믿습니다. (누가 10장 42절) 예수님 앞에 있는 마리아의 언권을 빼앗으려 든 마르다를 주님께서 책망하시고 언권뿐 아니라 선한 직분을 겸하여 주셨으니, 직분이라 함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 직분이 아니고 책임이 있는 직권을 가르치심입니다. (사도 시대부터 여자의 신앙이 남자보다 승한 점이 많으나 강도권과 치리권은 남자에게만 주셨다) 하나, 주님 당시 교회 제도가 없으니 만치 치리권을 남자에게만 주고 여자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최후에 부탁하신 말씀은 (너희는 땅끝까지 내 복음을 전하라 하셨으며 누가 24장 48-53절) 너희라 하신 말씀 중에는 남자만 아니고 여자도 있지 않습니까. 오순절에 성신도 남녀 차별이 없이 각 사람에게 임하셨고, 우리 주님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 최초에 여제자 마리아에게 보이시고 (명하신 말씀은 너는 가서 내 동생들에게 나의 산 것과 하느님께로 올라갈 것을 말하라 하셨으니 요한 20장 17절) 공포심에 눌린 남제자에게 활기 있고 권위 있는 소식을 전하라는 직분은 여신도에게 먼저 주셨으니 어찌 여자에게 언권이나 치리권이 없사오리까. (태초에 하느님께서 아담을 먼저 지으신 고로 권위가 아담에게 있다) 하나,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음으로 권위 있는 것이 아니요, 생존할 수 있는 자가 귀하고 권위 있다고 합니다. 물론 누구든지 도움을 받는 자가 용사가 아니요, 남을 도울 수 있는 자가 용사요 권위자라고 인증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먼저 지으셨으나 아담은 도저히 홀로 생존을 유지할 수 없음을 아신 하느님께서 아담을 살리기 위하야 하와를 돕는 짝으로 지으셨은즉, 쌍방이 동일함을 이름이요 결코 도움을 받는 남자보다 지위가 낮음을 의미하신 말씀이 아닙니다(창세기 2장 18절). 또 (범죄 이후에 직분이 판이하여 남자는 사업하고 여자는 생산케 되었다) 하니, 목사님께 묻고자 합니다. 범죄 전에는 남자가 생산케 되었습니다. 여자가 생산함은 결단코 죄값이 아니요, 산 사람의 어머니요(창 3장 20절, 4장 25절) 구원의 표라(딤전 2장 15절). (여자에게 봉급을 주어 교역을 시키면 누구를 대신 보내 생산을 시키며 아동을 교양하며 가사를 정리하며 남용여역男傭女役을 지도케 하겠느뇨) 하나, 남자는 치리권이 있으니 가사를 돌아보지 않고 남편의 권을 타인에게 대신하게 하여 교회의 치리자가 됩니까. 어떤 여자가 교회 치리권이 있다고 가사를 돌아보지 않고 생산권을 타인에게 대신하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너무 지나친 염려입니다. 남녀 물론하고 처지와 형편을 따라 직분에 피임될 것이요, 교역자 된 남성이 자기 남편 직분을 떠나서 교역에 종사하는 것을 저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남자이면 물론 치리권이 있으나 그렇다고 다 치리자가 될 것이 아닌 것같이, 여자도 치리권이 있다 하더라도 가사를 돌아보지 않고 다 치리자가 될 것은 아닙니다. 또 (여자가 예언할 때나 기도할 때 머리에 쓰라고 한 바울의 말씀을) 주장하나, 금일도 여자가 굴뚝 같은 치마나 수건을 머리에 쓰지 아니하면 교회에 나아가 공동 기도할 수 없을까요. 성경을 어찌 단편적으로만 생각하십니까. 바울 당시 고린도교회 부녀들이 분수에 넘치는 권리를 행사한 것은 예수께서 여자에게서 탄생하신고로 여자의 지위 존귀하였고, 또 주님 당시 남제자 중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자기 주를 팔았으나, 그 반대로 여신도 마리아는 삼백 냥의 가치 되는 향기름으로 주님의 몸에 부었으며(막 14:4~5), 그 반대로 여제자들은 가슴을 치며 예수를 따라갔고(눅 23:27), 베드로는 주를 3차나 저주까지 하며 배반하였습니다(마 26:71~72). 그 반대로 부녀들은 주의 십자가까지 갔고(요 19:15), 열두제자는 주의 무덤을 버리고 다 도망하였으나, 그 반대로 여성도들은 향속을 사 가지고 주의 몸에 바르려고 무덤까지 갔으니(막 16:1), 이러한 모든 사실을 듣고 알게 된 고린도교회 여성들은 너무도 질서 없이 권리를 남용할 뿐만 아니라 구원함과 하느님의 말씀이 자기들에게서만 낳다고 주장하는 고로 바울 선생은 그들을 교훈하기 위하여 하신 말씀입니다(고전 14:30). 절대로 후세 여신도들까지 주님의 교회에서 언권이나 치리권이 없다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울 선생 말씀 중에도 ‘남자는 여자에게서 낳다'(고전 11:12) 또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남자 여자가 차별이 무하다’ 하였지요(갈 3장 28절). 또 옛적에 하느님께서도 자기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하여 여자 드보라를 택하여 선지자와 통치자를 삼으셨으며(사 4장 5절) 군대를 거느리고 적군을 쳐 멸하기도 하고, 여선지자 미리암은 이스라엘 군중에게 찬양을 인도하였으니, 이 모든 성경 말씀은 해석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인즉 본문이오. (목사님 말씀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다가 멸망을 자취한다 하였으나) 본인은 이상 기록한 성경 구절을 의지하여 여신도에게도 반드시 언권과 치리권을 하느님과 예수 앞에서 이미 받았고, 또 이후에 주님 재림 시에도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남녀 성차별이 없이 받을 줄 의심 없이 깊이 믿으며, 취하려고 달음박질하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약 15만이나 되는 여교인들에게 주의 허락이 없다고 하고 저주하는 말을 오! 주여 들으소서 묵시 2장 26절을 그릇 해석하여 멸망을 자취한 것입니까. 조선예수교장로교 26만 교인 제위께 제가 여성이 교회 치리권을 찾으려는 근본 목적을 대강 고하려 하나이다. (1) 주의 사명이 있으므로 (2) 장로교 26만 교인 중 3분지 2 이상은 여교인인 까닭에 그들을 중심으로 한 설교는 여강도사가 필요함을 느끼므로 (3) 여교인을 치리할 시는 여성을 이해할 수 있는 여장로가 치리회에 참여할 필요가 있음 (4) 성신의 은사는 각각 달라서 여성이 자기 받은 은혜를 표현하려고 하여도 강도권이 없음으로 은혜를 나타낼 처소가 없음이오. 또는 여신도는 신학이나 성경 학원이나 기타 성경에 깊은 연구가 있을지라도 여자에게는 교회의 규칙이 허락하지 않음으로 용기 없고 말에 활기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신자는 공동 기도회까지 인도함을 불허하므로 간증이라도 면려청년회 이름을 빙자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여자의 고등교육의 가치와 진보가 무엇입니까. 현 사회에서도 남녀 차별을 아니하는 이때에도 기독교 안에서 남녀 차별할 까닭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여성은 교회에서 권리가 없으므로 책임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가 주의 도를 받은 지 28년인데 이러한 모든 것이 유감의 원인이 되어 다년간 기도하던 중, 작년에 104인의 동의를 얻어 여신자에게도 남성과 동일한 교회 치리권을 달라는 청원을 함남노회를 거쳐 총회에 진정하였던 바, 총회에서는 정치 5장 3조를 개정할 필요가 없다는 조건으로 여지없이 퇴각을 당하였으나, 역시 금년에 함남노회 구역에서 22교회 여신자 639인의 동의를 얻어 재차 함남노회를 거쳐 총회에 올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1934년 8월 22일 자 <기독신보> 977호

 

정통의 교회도 속염俗染은 가외可畏(세속에 물드는 것 두려워해야 – 편집자 주), 여자에게 언권 없다

 

중화 채정민

 

근래에 남녀 문제, 아동 문제, 빈부 문제, 암만 떠들어도 그 해결책이 성경 외에는 없다. 본인은 성경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추호도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

천지는 없어져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한다(마 24:35). 억지로 해석하다가 스스로 멸망한다 하였다(베드로후 3:12). 성경은 그대로 믿을 것이요, 딴 해석이 불가하다.

1. 우선 남녀 문제부터 과불급이 없이 성경대로 해결함이 가하다. 근일에 감리회에서는 부인 목사가 실현한다. 장로회에서는 여장로 문제가 별안간 오게 되었다. 예수 당시와 사도 시대부터 여자의 신앙이 남자보다 승한 점이 많아도 강도권과 치리권은 남자에게만 주었다. 그러면 여자를 무시함인가. 그는 아니다. 우리 주께서 하느님 뜻대로 하는 부인은 모친과 누이라고 하였다(마 12:50). 그러나 사도도 남자요 장로도 남자이다(행 6:5). 서리집사에는 여자도 있는 듯하다(롬 16:1).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선후가 있고 직분이 다르다. 아담은 주장자요, 하와는 보좌자이다(창 2:18). 범죄 후에는 더욱 직분이 판이하였다. 남자는 사업이요, 여자는 생산이다(창 3: 16-19). 그런 고로 남자에게는 사업대로 봉급을 주어 교역을 시키려니와, 여자에게 봉급을 주어 교역을 시키면 누구를 대신 보내 생산을 시키며 아동을 교양하며 가산을 정리하여 남용여역男傭女役(남성의 할 일과 여성의 역할 – 편집자 주)을 지도케 하겠느뇨(잠 31:15). 그런 고로 신세가 어려운 사람에게 봉급을 주어 교회에 보좌자로 세우는 것 외에는 여자에게 더할 수가 없다. 여자가 남자에게 강도는 못하지만 여전도사와 여집사는 세울 것이다. 여자가 묵시 받아 여선지자가 되어서도 남자의 권세 아래 있는 표로 머리에 무엇을 쓰고야 기도와 예언을 할 것이요(고린도전 11:1-10). 그렇지 못하면 규칙대로나 이치대로는 절대로 남자에게 강도하지 못할 것이다(고린도전 14:34-35, 디모데전 2:11-15).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인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라 하였으며(고린도전 11:3), 부녀가 가르치고 사나이를 주관하는 것은 불허라 하였으니(디모데전 2:12), 이것이 여자계와 인류계에 해독을 줌이 아니요, 막대한 행복을 준 것이다. 여자에게 언권과 치리권이 없는 고로 여자는 더 큰 복을 받아 여자의 구원 얻는 수가 남자보다 퍽 많은 것 같다. 남자는 언권과 치리권을 어깨에 메고 많은 고통을 당한다. 주님께서 여자계를 사랑하시어 고통은 제거하시었다. 만약 여자에게 다 언권과 치리권을 주었다면 남자보다 더 큰 고통 중에서 복을 잃을 일이 여간이 아닐 듯합니다. 여하간 성경은 복 주신 말씀이니 순종할 것이다. 여전도사는 여자 회집에서만 강도할 것이요, 남녀가 같이하는 예배에는 아무것도 아니할 것이다. 평양에 거주하는 선교 부인이 촌에 가서 사경시키다가 혹 남자가 방청코자 하면 무례한 일이라고 보내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이상 성경 구절을 보고야 어찌 여자 목사, 여자 강도를 허하리오. 성경은 시대를 초월하였다. 절대로 시대별로 말하지 못할 것이오. 여자 학식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천국 시대에는 변한다. 부활 후에는 시집·장가 가지 않고, 천사와 같다. 그때에는 금세의 여자 되었던 사람이 승할 줄 알 것이 신앙과 사랑이 남자보다 승한 상급이 분명히 있을 터이다(마 22:30). 그러나 이 육신 가지고 이 성경 가지고 이 지상에 있을 때까지는 꼭 성경대로 아니하면 위반이다. 선진국도 신앙 같다는 타 교파도 맹종할 뿐이옵고, 우리는 잘 교도할 권위가 있다. 한 번 성경에 위반되면 일사천리로 성경을 폐하는 데까지 가고야 말 것이다. 5천 년 전에 어떤 서울 양반이 자기 아들에게 통감 초권을 가르친다. 제濟나라 위왕이 아대부(벼슬 이름 – 편집자 주)를 불러 말하기를, “자네가 아지방(지방 이름 – 편집자 주)에 간 후로 내 좌우 신하가 날마다 명관이라고 칭찬하기로 암행어사를 보내어 본즉, 너무 학정을 하여서 민간에서 작풍을 못하고 해산하였으니 네가 토색을 많이 하여 내 좌우 신하에게 뇌물을 많이 하였다” 하고 좌우 신하와 아대부를 삶아 죽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그 아들이 말하기를 “군왕의 좌우 신하에게 뇌물을 주고 칭찬을 구하는 자는 삶아 죽이는 법이면 아버지도 삶아 죽는 일을 당할 터이니, 소자가 누구를 의지하고 살리오” 하였다. 그 양반이 얼굴이 변하면서 통감은 교과서에 부적당하다고 하였다. 어느 여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성경을 교수하다가 그 아들이 말하기를, “디모데전서 2:12에 여자는 가르치고 남자를 주관 말고 조용하라 하였는데 어머님은 왜 목사 노릇을 합니까” 하면 그 여목사는 틀림없이 성경이 잘못되었다든지 아이는 성경 볼 필요가 없다든지 무슨 기괴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속)

 

1934년 8월 22일 자 <기독신보> 977호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씀 (2)

 

성진중앙교회
목사 김춘배

 

3. 여권 문제

작년 총회에 함남노회에서 여자에게도 장로 자격을 주자는 헌의와 겸하여 최영혜 씨 외 103인이 연서하여 여자에게도 치리권을 허락하여 달라는 청원을 하였었습니다. 이에 대한 정치부의 ‘정치 제5장 3조를 개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허락할 수 없사오며'(제21회 총회록 65엽 3조)라는 간단한 보고에 의하여 이 헌의는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이 보고문이 그 헌의와 청원을 부결하는 이유의 만족한 설명도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마는 그 헌의를 채용치 못함은 심히 유감이며 그같이 부결한 원인이 어디 있는지 이해가 힘든 바입니다. 아직까지도 남존여비의 낡은 풍습을 고수함도 아닐 것이요. 여자는 거내이불외居內而不外하라(안에 머물고 바깥일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 – 편집자 주)는 남루가 된 도덕을 지키느라고 그러는 것도 아닐 것이요. 여자는 조용히 하여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는 2천년 전의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알고 그러는 것도 아닐 터인데요. 그렇지 않으면 장로교회 내 여성들의 지식 정도와 기타 등등이 아직도 남성들에게 믿지 못하는데 원인함일까요.

같은 땅 안에서 똑같은 역사의 길이를 가지고 있는 감리회는 상하 모든 회에 있어 남녀 간 아무 차별과 현격이 없을 뿐 아니라 교회 최고 기관에서 그 위를 점하고 여목사까지도 있는데 우리 장로교회는 아직도 장로와 집사(안수집사)의 권도 주지 않고 공공연하게 남녀를 차별한 헌법을 만들어 놓고 여권의 신장을 막고 있다는 것은 참 모순도 심한 모순입니다. 이 같은 차별적 헌법을 고수한다는 것은 여자의 향상을 저해하는 것이요. 좀 똑똑한 인물은 활동할 무대를 얻지 못하여 교회 문을 등지고 나가거나 좀 더 영리한 자는 다른 교파도 자리를 옮기게 하는 것입니다. 장로교회 사람으로 타 교파에 가서 유력한 지위를 점하고 활동하는 남녀의 수가 결코 적지 않습니다. 할 일이 많으며 많은 인물을 유용할 만한 큰 교파의 사람들이 다른 교파로 옮기게 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가 과거에 청년 지도에 있어 노력과 아량이 적은 것과 여자에 대한 차별이 그 큰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자의 정도가 아직 뒤떨어짐이 있다면 그것을 향상시킬 만한 기회와 권을 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치리권을 주는 것은 활동할 무대를 주는 것이요. 향상할 기회를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의 힘을 크게 하여 발전을 촉진합시다. 그런고로 금년 총회에서는 하회의 헌의가 있건 말건 주저치 말고 여자에게 치리권을 부여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이 같은 차별적 헌법은 남녀평등이니 여자 해방이니를 강단에서 외치는 우리의 주장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이 법을 하루를 더 둔다면 우리 스스로를 하루 더 모욕함이요 교회 발전을 그만치 지연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 여권 문제를 논함에 이르러 전의 일이 연상됩니다. 벌써 7, 8년 전인가 합니다. 면려회 기관지 <진생>을 통하여 청년 지도를 위하여 총회에 면려청년부를 만들라고 논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에 총회에서 이에 대한 관심이 생겨 면려회를 종교교육부에서 관할하다가 작년에 이르러 면려회부를 독립시키고 전임 총무까지 두고 활동함을 볼 때 속으로 기뻐하는 바입니다. 여자 치리권은 마침내는 주고야 말 것이며 그같이 될 줄 굳게 믿는 바입니다. 아니 주지 못할 것이요 우리 정신의 어그러지는 헌법 조문을 그대로 두고 여권 부여를 지연함은 후일에 스스로 배꼽을 쥐어뜯는 한을 남길 뿐일 것이매 이에 대한 처단의 속함이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1930년 1월 22일 <기독신보> 737호

 

여전도인 불평 희망 (4)

 

평등으로
개성 최호경

 

희망을 말하려니까 불평부터 말하여야겠다.

우리 예수교인으로서 예수의 가르치심을 받은 바 평등주의를 부르짖기는 하지만은 우리 교회에서 실현하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 남존여비의 악습이 사라지지 못함인지 남녀 교역자 사이에도 계급과 불평등이 있는 것은 섭섭한 일이다. 이것은 정신 문제요, 또 하나 중대한 물질 문제도 여전도인에게 너무 생활비를 적게 주어 고통과 장애를 많이 끼치는 것은 유감천만이다.

이 두 가지를 하루 속히 고치기를 바라고 바란다.

1934년 8월 29일 자 <기독신보> 978호

 

정통의 교회도 속염俗染은 가외可畏(세속에 물드는 것 두려워해야 – 편집자 주), 여자에게 언권 없다 (완)

 

중화 채정민

 

이것이 성경을 폐하는 것의 폐단입니다. 여목사 세우는 교파는 장래에 아니 지금에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지 부인하는지 본인이 이 말씀하기가 여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한 것은, 누군가 이 말씀을 반박하려고 동서고금 이야기를 주워대어 성경 말씀을 위반하면 천지가 없어져도 없어지지 아니할 말씀과 억지로 해석하다가 피해를 입음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지경에 들어가면 어찌하오. 이 늙은이의 산적한 회포는 우리 조선교회는 정통을 확립하며 감리교·장로교 양파가 단일파로 성립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으로 동양을 구원하고 서변에 이르기까지 대유익을 공헌키를 믿었더니 소원이 여의치 못함을 길게 탄식하나이다. 가령 감리회에서 성경을 위배하면, 장로회는 무슨 간섭할 권한은 없지만 충고야 못하겠나이까. 교파로 말하면 감리교·장로교 양파보다 더 친근한 교파가 없습니다. 만일 피차 충고와 권면도 못할 지경이면 이단시하는 느낌이 없지 않으니, 여자 목사를 위하며 여자가 강도를 하는 일은 우리 장로회 상회로서는 특히 1차 충고하는 것이 가하오며 미국남북감리교회에도 충고 권면서를 보낼 권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략)

1930년 1월 15일 자 <기독신보> 736호

 

여전도인의 불평과 희망 (3)

 

낙관이다
만주 길림 이배세

 

마음속에 시시로 느끼는 차에 귀보에서 물으시니 반갑습니다.

조선교회를 비관하는 이가 혹 있으나 나의 관찰로는 낙관이다. 왜냐하면 조선 내지나 남북 만주나 어느 교회를 가 보든지 신도 수의 반수 이상은 여자입니다. 장래 조선교회에 주인공 될 어린이를 기르는 여성이 교회에 많이 오는 것은 가장 기쁜 일이요, 소망이 있는 일입니다. 또 이런 여성을 인도하는 여전도인의 책임은 귀하고 중합니다. 그러므로 조선교회에서는 여자 사업에 특별히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러고 남존여비의 악습을 버리고 다 같이 힘을 합하여 새 조선의 새 교회를 만듭시다.

 

인격 존중
경성 전정길

 

예수의 사랑으로 황무지를 개척하며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여전도인의 희망은 오직 의롭지 못한 창생을 구원하여 여호와의 넓으신 뜻을 조금이라도 성취하려는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주림이나 헐벗음이나 죽임을 당한들 – 산이든지 바다든지 핍박이든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도를 인류에게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하겠다는 큰 희망 아래에는 무서울 것이 없고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우리보다 먼저 수많은 순교자(殉敎者)들이 있지 아니한가. 다시 일반에게 희망하는 바를 몇 가지로 쓰려 한다.

  1. 1. 여전도인의 인격을 존중히 여기자

과거 인류의 두뇌로는 큰 사업을 여자에게 맡길 수 없다 하였으니 그 이유는 인격이 없고 의지가 박약하다 함이었다. 과거는 그 이유가 적당하였을지 모르나 현대에 있어서는 이 말은 여자의 인격을 무시하고 존중히 여기지 않는 망설이다.

  1. 2. 여전도인의 지력(智力)을 승인하라

여전도인은 무식하다고 하여 교회 내에 직접 권리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 사업은 반편이다. 여전도인의 지식을 발휘케 하고 인정하자.

  1. 3. 여전도인에게 사업의 권위를 주자

여전도인은 일개 원조자(援助者)로만 알지 말고 사업을 완전히 맡기라.

이상과 같이 여전도인의 인격을 무시함으로 상당한 인격자는 여전도인 되기를 싫어한다. 여전도인의 지식을 인정하지 않는 고로 지식이 있는 여자는 여전도인이 되기를 싫어한다. 또 사업에 뜻있는 여자가 교회에서는 사업의 권위를 주지 않는 고로 나가서 다른 사업을 할지언정 여전도인 되기를 싫어한다. 그러므로 조선교회를 지금보다 향상시키려면 여전도인의 인격 존중, 지식 승인, 사업 권위를 줄 것이다. 여기 여러 여전도인 자신도 주의와 노력을 더할 것은 물론이다.

1930년 1월 8일 자 <기독신보> 735호

 

여전도인의 불평과 희망 (2)

 

삯꾼과 일꾼
경성 박승호

 

조선의 여전도인 된 저에게 불평과 희망을 써 보내라고 하심에 대하여 현재 교역을 하고 있는 자로서 말씀하기에 미안한 점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사랑함이라 하면 몇 가지를 쓰고자 하나이다. 첫째로 생각하는 바는 남녀 전도인의 차별적 대우라 합니다. 혹 어찌 생각하실는지 모르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복음 전파에 성직을 받아 주님의 사명을 충성되이 봉행奉行코자 함에는 어찌 남녀의 차별이 있사오리까. 기독의 신성한 정신을 가지고 거룩된 천국 백성을 인도하려고 눈물과 한숨과 탄식으로 애쓰는 그 마음으로 하여금 고와 락을 같이할 만한 차별 없는 우대라고 하면 비록 고난과 불평이 있을지라도 기쁨으로 받으며 즐거움으로 생각하여 섭섭함이 없을 줄 아니이다. 둘째로 생각하는 바 조선 교회에 간절히 바라는 바는 좀 더 힘을 써서 자급 전도인을 두어야 하겠다고 합니다. 교회마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일반 교회에서 여전도인에 대하여는 외국 선교회를 의뢰하여서 자급 같은 것은 의외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빈약하여서 할 수 없는 교회에 대하여 말함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선교회와 교회 그 두 사이에서 일하는 자로서는 지내 보지 않은 자가 아니면 그 사정은 모를 것입니다. 결과의 끝까지 헌신적 주의 사역자의 결심을 가지고 나아가다가 생활의 압박과 주위의 하대와 고독을 느낌이 있으며 쓰림이 있을 때 동정하는 누가 있으면 모르거니와 만약 고독한 자로서 그러한 경우를 당하면 그 마음에 쓸쓸함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한 장애와 부대낌이 없으면 좀 더 신령적 활동에 곤란치 아니하며 교역의 정신이 단순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삯꾼으로 생각지 말고 주의 일꾼으로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이올시다.

1930년 1월 1일 자 <기독신보> 734호

 

여전도인의 불평과 희망 (1)

 

네 가지 차별
춘천 최경자

 

울음으로 나서 울음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한평생을 고해의 인생들이라고들 하는 참 즐김이 없는 세상에서 전도인의 직책을 단순히 육신적으로만 본다면 불평의 불평이 쌓이고 쌓였다고 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우리들의 천직이 이것이니만큼 참아 가는 데에 귀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여전도인을 위해 동정하시는 귀사의 황송한 뜻을 조금이라도 감사키 위하여 볼 것 없는 천감淺感이나마 몇 줄의 글이라도 씁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맘이 불평을 품고 있지 않은 것만은 여기에 말해 둡니다.

1. ‘예수께서는 자유와 평등을 말씀하셨다’고들 하면서 오늘의 기독교 내에는 너무나 계급과 차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가령 연회 혹은 총회라 하면 예수교 내의 전부를 의미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남전도인만 모이는 집회인가요? 여전도인 중에 특별한 사정이 있어야 아깝게 주는 반半 여비를 얻어먹고 가니… 이것 좀 없애지 못할까요?

2. 교회를 위하여 힘쓰고 애씀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만은 남전도인은 주택이 있어도 여전도인은 없으니 이것도 금년부터 전도부인이 방 얻으러 다니지 않도록…

3. 교회학교 교사는 주일학교 사상이 있는 이가 하였으면 합니다. 장래의 조선과 교회를 위하여…

4. 처음에 전도사로부터 목사 장로까지 올라가는 사다리를 젊어서나 늙어서나 처음이나 나중이나 좋으나 그르나 20~30여 원의 전도부인은 바라만 보지만 진리로 따진다면 자유니 평등이니 하더라도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오. 비노니 금년에는 힘센 천리준마가 뛰어가다가 줄네줄네 늘어선 사다리를 훌부시고 나갔으면…(끝)

1935년 10월 23일 자 <기독신보> 1038호

 

<기독신보>를 읽고서 (2)

 

장민숙

 

2. 여권 문제, 다시 말하면 여권운동은 성경상 위반이니 그런 교역자도 치리 운운

예수님 운동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 첫마디 말씀이다. 우리는 예수님 약속하신 대로 땅끝까지 증인이 될 것밖에 없다. 그러나 여권 운동이 성경에 위반되는 구절은 예수님 자신이 하신 곳은 없으시다. 그 당시 그 습관 그 사회제도에서 바울 선생은 편지서에 가끔 여자는 운운을 보게 된다. 우리는 예수를 토대로 한 종교를 믿는 이상 바울을 토대로 한 예수는 믿어지지 않는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나라가 퍽이나 남존여비의 사상이 뿌리박힌 것을 볼 수 있으니, 예를 들면 같이 죄를 범하였어도 여자만 끌고 왔던 것만 봐도 알 것이다. 이때 예수님이 어떻게 치리하셨는가. 그에게 구원을 허락지 아니하셨나. “너는 여자이니 유대국 사상에 의하여 벌주어야 되겠다”고 안 하셨다. 활발한 베드로 실수할 때 “너는 남자이니 용서하겠다”고 하신 예수님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도 없다. 오직 예수님 세상에 계실 때 하루 저녁이라도 잘 대접하겠다고 분주히 음식 준비한 이도 여자이고, 떠나시기 전에 귀한 말씀 더 배우려고 애쓴 이도 오직 그 시대 어려운 남존여비 시대에 있는 마리아의 가정 아름다운 형제가 아니고 무엇이랴. 활발한 베드로는 세 번이나 모른다고 도망갔으며 마가 요한은 홑이불만 감은 채 도망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외 여러 부인들은 어찌 되었는가. 칼을 들고 몽치 가지고 창을 비켜 든 틈에서라도 모든 부인들 슬피 통곡하며 따라갔다. 그뿐이랴. 무덤에 먼저 간 이도 여자이며 예수를 먼저 뵌 이도 여자이며 제자에게 첫 번 전도한 이도 여자이다. 그렇다고 여권 운동하는 이를 치리하지 말라고 하기 위해서 여자를 내세우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 운동에는 남녀가 동등이라는 것을 말하려 함이다. 바울 선생의 편지만 보고, 옛날 유대 나라 역사 구약만 보고 하는 말이라면 나는 그 이상 지금 우리 교회가 요구하는 점을 더 많이 찾을 수가 있다. 첫째로 바울 선생은 자작자급 전도하셨다. 여러 교역자들이여 수고하고 마땅한 보응을 받는 것은 성경에서도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회는 경제공황이다. 한재와 수재로 매일 굶는 사람이 몇천 명이냐. 이사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때에 바울의 자작자급 전도자 교역자가 필요하지 않은가? 좀 더 필요한 좀 더 우리 사회에 영을 구원할 좋은 길을 연구하고 실제로 농촌이라도 들어가서 일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다고 이미 보도된 것만 못하다. 사실 농촌 가서 일하며 전도하자니, 된장국과 보리밥 잡수실 줄 아는 분이 몇이나 되리요. 이번 총회에 이름난 분들은 적어도 어떤 전문학교 교수들이고 큰 교회 교수들이고 큰 교회 교역자이시니 높은 곳에서 머리 행세하신 분이 많은 모양이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우리 주머니가 빈 이상 마땅히 주님 위하여 전신을 바치겠다고 하는 교역자가 나기 바란다. 애쓰는 교역자를 치리해 내는 것보다 몇백 배 효과가 있다고 본다. (하략)

 

1935년 조선예수교장로회 24회 총회 회의록 중 김춘배 목사 조사 보고서

 

2. 김춘배 목사 성경 해석 문제에 대한 답안

 

성진중앙교회 목사 김춘배 씨가 <기독신보> 제977호에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라는 문제로 기재한 논문 중 ‘여권 문제’라는 대지하에 사도 바울이 ‘여자는 조용하여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한 것은 ‘2천 년 전 한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의 성경 해석을 술한 것은 큰 오류(誤謬)라고 인정하나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서 여자의 교회 교권(敎權)을 불허한 말씀은 2000년 전 한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35절에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와 같이 부녀는(헬라어 성경 원문에 33절 문구가 34절에 연접하였음) 교회 가운데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느니라’ 한 말씀에 대해,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성경 본문을 떠난 여러 가지 구구한 설명을 붙이면서 주장하기를, 사도 바울이 여자의 교권을 금한 이 말씀은 고린도의 특수한 교회에게, 특수한 기회에, 특수한 교훈으로 준 것이요, 당시 모든 교회를 위하여 법을 세우려 한 것이 아니며, 장래 모든 교회를 위하는 의사는 더욱 없었다고 하나이다. 이런 해석은 여권운동이 대두하는 현대사조에 환영을 받는 해석은 되지만, 성경 본문에 상하 문맥을 살펴볼 때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해석입니다. (1) 바울이 33절에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와 같이’라고 말하여 여자의 교권을 불허하는 규율은 당시 모든 교회에서 이미 시행되던 것임을 언명하였고, 36절에 ‘하나님의 말씀이었지 너희게로부터 난 것이냐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하여 고린도교회가 만일 여자에게 교권을 허락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시작한 모(母)교회와 복음이 임한 다른 여러 교회에 통행하는 규율(여자에 교권을 불허하는)에 어그러지는 독특한 망동일 것이라고 경계하였나이다. 그러면 성경 본문이 표시하는 대로 보면 여자에게 교권을 허락하는 것이 한 지방 교회에 있었던 일이었고 여자에게 교권을 불허하는 것은 모든 교회의 보편적 규율이었나이다. (2) 바울은 또 34절 하반에 ‘저희 율법에 이른 것같이 복종할 것이오’ 하여 여자에게 교권을 불허하는 규율의 성경적 근거를 지시하였으니 그것은 창세기 3장 16절에 여자는 남자의 주관한 바 되리라 한 말씀이 여자의 종속적 지위(從屬的 地位)를 의미하는 말씀임을 인정하고 관설함이었나이다.

이렇게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기로 성경에 이미 명령되어 있으니 남자를 포함하는 교회 위에 교권을 가지지 못할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3) 바울은 다시 37절에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말하여 여자의 교권 문제를 논한 이 교훈은 그 장 상부에 술한 바 신령한 은사에 관한 교훈과 함께 하나님의 뜻에 그 근권을 가졌다는 것을, 즉 그 신적 권위(神的 權威)를 언명하였나이다. 그러면 여자의 교권 불허는 사도 시대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통행하는 규율이었으며 성경 율법에 근거한 규율이었으며 ‘주의 명령’에 의하여 신적 권위를 가진 규율이었으니 그것이 어찌 한 시대 한 지방에 국한된 교훈이리요. 그것은 분명히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 사도 바울이 ‘부녀가 가르치고 사나이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한 말씀은 이상에 논한 바 고린도전서 14장 34절 말씀을 확대하여 여자의 교권을 금지함에 더욱 명세히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여자의 교회 공석상 언권을 불허한 것도 그 교훈 강도권과 치리권을 모두 금지하는 의미를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은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는 두 가지를 갈라 말하였으니 즉 ‘가르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여 여자의 공예배석에서의 교훈 강도권을 금하고 또 ‘사나이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야 그 교회 치리권을 금하였나이다. 좀 더 분명히 말하면 본절은 여자에게 목사직과 장로직을 불허함에 더욱 명세한 말로써 하였나이다. 본절에 의미가 이러하다는 견해는 그리스도 교회 역대에 유구히 전래한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정치 형식을 달리하는 여러 교파(교장 정치의 교파나 교황 정치의 교파나 감독 정치의 교파나 장로 정치의 교파나 희중 정치의 교파를 물론하고)가 공동으로 가지고 내려 온 견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여자에게 교권을 불허하는 이유 두 가지를 다시 말하였으니 (1) 13절에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는 후에 지음을 받았으며’라고 말하여 창조의 차서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뒤졌다는 것을 지적하였나이다. 역사는 창조의 차서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남자를 먼저 짓고 여자를 후에 지어 남자의 협조자로 삼으셨으니 협조자라는 종속적 지위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가 섞여 있는 교회 회중을 가르치거나 주관함이 불가하다는 의미입니다. (2) 다음에 14절에는 바울이 하와가 아담보다 먼저 유혹을 받아 죄에 빠진 사실을 말하여 선천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교도(敎導)의 재능이 결핍함을 지적하였으니 그것은 여인의 교권을 금함에 보다 더 강한 이유였나이다. 그리고 15절에서 여자의 천직은 가정생활이라는 의사를 표시하였다는 것도 여러 성경학자의 주장하는 바 참고할 만한 견해라고 생각하나이다. 그러면 창조의 차서와 천부(天賦)하신 재능에 의하여 교회에서의 남녀의 지위와 직무가 다르다는 것을 가르친 이 말씀을 어째서 일시적 지방적 교훈으로 볼 수 있으랴. 하나님이 정하여 놓으신 원리 원칙에 의하여 명령된 것은 아무래도 만고불변의 진리 됨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상 논한 바 사도 바울의 교훈이 여자의 종교적 재능을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자가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교회 일에 협조하며 여러 종류의 교훈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은 성경에 인정되었나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행 중에 여자들의 수종을 허락하신 것과 바울이 여자의 비공식 교훈을 말한 것(딤후 3장 14절, 디도 2장 3절, 사도 18장 26절)을 보아 알 수가 있나이다. 여자가 특별한 은혜를 받아 예언을 한 것도 사실이며(사도 21장 9절, 고전 11장 5절) 바울이 그것을 금치 아니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여자가 여러 방면으로 교회 일에 협조하며 여러 종류의 교훈하는 일을 하는 것도 정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남녀를 총괄하는 전회에 대하여 법적 교권을 가지고 가르치며 치리하는 것만은 남자의 특권에 속하였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친 뜻이고 오랫동안 속 모든 교회가 유구히 인정하여 온 신념입니다. 그래서 목사직과 장로직과 기타 안수 받아 임직되는 교직은 여자로서 받을 수 없으며 남녀가 공동 회집한 예배석에서는 여자가 가르칠 여자의 교권을 요구하는 이들은 구약에 드보라와 기타 몇 사람의 여선지자의 일을 실례로 들어 가지고 여자의 교권이 하나님의 허락하신 바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칼빈의 답변과 같이 ‘하나님의 비상 행동(非常 行動)은 그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서 설립하신 바 정치의 통상 법칙을 전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예외의 일을 근거로 하여 교회 정치의 상도를 문란함은 불가할 것입니다. 또 구약에 여선지가 나타난 사실을 잘 아시는 예수께서 사도 반열에 여자를 섞지 않으신 일과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도들이 7집사를 택할 때에 (특별히 여성인 과부들을 돌보기 위하여) 여자를 택하지 않은 것을 보면 구약 여선지의 일은 이 문제와 하등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또 여자의 교권을 공공연하게 금지하는 선언을 발표하는 바울도 구약 여선지의 일을 몰랐을 것은 아닙니다. 또 여자의 교권을 금한 성경 말씀은 여자를 천대하는 비인도적 윤리(非人道的 倫理)를 가르침이 아닐까? 결단코 아닙니다. 교회에서 남녀의 지위와 직무가 다르다는 것을 가르친 것쯤은 결코 비인도덕적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고 말하면서도 ‘주 안에 사나이뿐이고 여인이 없는 것이 아니오 여인뿐이고 사나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으니 전후의 양 교훈 사이에 모순이 없음을 바울은 잘 알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여자의 교권을 불허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여권운동이 대두하는 현 시대사조에 영합하기 위하여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은 그 정신 태도가 파괴적 성경 비평의 정신 태도와 다름이 없나이다. 성경 상하 문맥에 가르친 말씀은 돌아보지 않고 세상 사람의 욕심에 맞도록 난데없는 딴 해석을 붙이는 것은 성경의 신성과 권위에 대한 막대한 능욕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경멸히 여기는 인물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본분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믿는 우리 장로교회에 교역자로 용납할 수 없나이다. 그런 인물들은 우리 교회 신조례 1조에 위반하는 자임으로 우리 교회 교역자 됨을 거절함이 가하다 하나이다.

3. 성경의 파괴적 비평을 가르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을 우리 교회 교역계에서 제외하기 위하여 총회는 각 노회에 명령하여 교역자의 시취 문답을 행할 때에 성경 비평과 성경 해석 방법에 관한 문답을 엄밀히 하여 조금이라도 파괴적 비평이나 자유주의의 해석 방법의 감화를 받은 자는 임직을 거절케 할 일이오며 이미 임명을 받았던 교역자가 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는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제6장 제42조 43조에 의하여 처리케 할 일입니다.

4. 문제의 성진중앙교회 목사 김춘배 씨 사건은 그 소속 노회에 명령하여 상술의 규정에 의하여 처리케 할 일이오며 그가 이미 본 연구위원 전에 별지와 같이 석명서(釋明書)를 보내어 자기가 <기독신보> 제977호에 기재한 ‘그 문구가 만약 성경의 권위와 신성을 손하고 교회에 폐해가 미칠 염려가 있다면 그 책임의 중대함을 느끼고 취소하기를 주저치 아니하겠나이다’ 하였사오니 그 소속 노회로 하여금 참고케 할 일입니다. 이상.

<기독신보>에 게재된 ‘여권 문제’에 관한 필자의 석명

<기독신보> 제977호에 게재한 ‘여권 문제’ 중에 교회에 폐해를 끼칠 문구가 있다 하여 총회에서 논의되고 연구위원을 택하기에 이르러서 여러분들에게까지 걱정을 끼쳐드리게 됨은 필자로서는 황송함과 책임의 중대함을 느끼고 이에 필자의 본의를 고하여 여러분에게 참고하게 하려 하니 하량하소서.

1. 그 게재문의 근본 의도가 성경을 해석하려 함이 아닙니다.

2. 우리 조선예수교장로회에도 벌써부터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사실에 의하여 그같이 말한 것입니다.

3. 그러나 그 문구가 만약 성경의 권위와 신성을 손하고 교회에 폐해가 미칠 염려가 있다면 책임의 중대함을 느끼고 취소하기를 주저치 아니하나이다.

주후 1935년 2월 20일
성진중앙교회 목사 김춘배
연구위원 첨전